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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데이비드 베너타

서광사 출판

Better Never to Have Been :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살다보면 기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누구나 한 번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근거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막연히 지금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존재보다 무존재가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 논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은 굉장히 단호할 뿐더러 이성적이다.


 

우리 각자는 존재하게 됨으로써 해를 입었다.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이득이 아니라 항상 해악이다. 나쁜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 어떤 삶도 곤경이 없지는 않다.

 

 

고통은 흔히 극심하다.

설사 그 고통이 우리의 마지막 날에 겪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긴 기간의 노쇠함을 겪도록 자연의 저주를 받는다.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매일 또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겪는 부정적 정신 상태를 일으키는 조건들을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배고픔, 목마름, 똥 마려움, 오줌 마려움, 피곤함, 스트레스, 체온 불편감, 그리고 가려움 등이 있다.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불편 중 적어도 일부는 만성적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구제할 수도, 추위에서 벗어날 수도, 스트레스를 피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얼마간 그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사람도 바로 그럴 수 있거나 완전히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매일매일 어느 정도 부정적 정신 상태를 겪는다.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매일 상당한 시간이 이런저런 종류의 그와 같은 부정적 상태로 특정지어진다.

 

 

우리의 욕구가 삶의 우여곡절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어떠한 욕구도 즉각 만족되지 않는다. 그러한 욕구는 그것이 만족되기 전에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 욕구가 충족되기 전에 좌절의 기간을 견딘다. 욕구가 발생하고 난 직후 충족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세계를 그대로 보자면 이런 일은 보통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어떤 기간 욕구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

이 기간은 몇 분에서 몇십 년까지 다양하다.

 

 

욕구가 충족된 경우에도 충족 상태는 짧다.

공직을 욕구하고 선출되지만 재선되지는 않는다. 결혼을 욕구했고 결국 충족되었지만, 그러고 나서 이혼한다.

휴일을 원하지만 휴일은 끝난다.

욕구는 아예 충족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모든 욕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를 욕구한다.

 

 

 

욕구의 쳇바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일부 욕구의 충족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시적인 데다가 설사 그 욕구들이 충족된 채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욕구가 그 자리에 발생한다. 그래서 최초의 만족은 곧 새로운 욕구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된다.

 

이 중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는 닥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하는 자들만이 해를 입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만들지 않아야 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만든다.

 

결코 아이를 위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번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어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적절한 패러다임인지는 절대 명백하지 않다.

 

언제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할지를 알고 이 앎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숙의 징표이지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다.

 

부양가족이 있는 부모를 어떤 이유에선지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긴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인질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가치를 높이는 일이 불공정하며 그런 행위에 보상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이미 인구가 많은데도 그 인구의 대체율 이하로 출산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우려하며 정부 개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우려라는 건 노동 연령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많아진 노인 인구를 먹여 살릴 납세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진화적으로 더 최근 일이고 더 진보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천주의로 향하게 하는 강력한 생물학적인 성향의 영향 하에 놓여, 이 결론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나쁘다는 점을 부인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꽤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평가를 설명하는 것은 삶의 실제 질이 아니라 이 심리적 현상이다.

 

이 심리적 현상 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몇몇 사람들이 낙천편향 원리라고 했던 것, 즉 낙천주의 성향이다.

낙천편향 때문에 우리는 나쁨을 간과한다. 적응도 하나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매일의 불편에 너무도 익숙해져 그 불편들이 만연해 있는데도 그것들을 전적으로 간과한다.

 

 

우리는 사태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에 관하여 과장된 견해를 갖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관점에 의지한다.

즉 인간의 관점이나 개인의 관점에 의지한다.

 

그 관점을 취하면 적어도 일부 삶은 의미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류에 봉사하는 일에 헌신한 삶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의미 있을 수 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인류애주의자와 풀잎 세는 자의 삶은 모두 무의미하다.

 

낙천주의자가 염세주의를 참지 못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흔히 의기양양해 하는 마초적인 어조를 가진다.

 

‘쓴웃음을 짓고 참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염세주의자의 약한 면을 의식하고는 조롱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낙천주의자는 설사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해악이라는 점에서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을 곱씹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곱씹는 것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어 그 해악을 가중시킬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예리한 감각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해악을 가하는 것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만일 그들의 쾌활함이 자기기만과 그 결과로 생기는 출산을 데리고 온다면,

그들은 넓은 관점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낙천편향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배경을 흐릿하게 지우도록 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거기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할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 점이 그들을 옳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읽다보면 마음은 불편할 수 있지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건 아주 낙천주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럴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끝내 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함의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와 도움이 될까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즉, 지금 살아있는 존재가 논할 가치로서 이 주장이 적합한 질문이었냐는 생각에서다.

 

태어나는 것이 나은가?

(단호히) 아니오.

 

물론 진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제, 논의 자체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논하고 나눌 몫은 아닌 듯하다.

 

만약 아이를 출산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 중이라면 이 책은 어떠한 면에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예기치 않게 죽음을 준비 중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에 읽은 소설에 거론되어 있어 궁금해서 본 책이었는데 번역이 좀 더 매끄러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탓에 집중해서 못 읽은 편이라 괜히 뭉뚱그려 단지 그런 생각만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

어차피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니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지금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면에서는 다 똑같다.

그러나 그 점에 수긍해도 내가 살면서 가질 생각이나 마음은 아니다.

엄마 뱃속에서 선택권이 있었다면 모를까. 또는 죽어 다시 환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모를까.

 

때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도 인간의 욕심, 미련일 수 있다.

윤회조차 그런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인간 중심의 관점일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처럼 그 모두 알지만 사람은 다 모른 척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존재가 무존재를 위해 굳이 이 내용을 논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평없이 삶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이러한 주장과 내용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결국 태어나는 것은 우위도, 죽고 사는 것 또한 우위도, 하위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태어나게 할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무엇을 위해 생명을 만드는 것인지 잘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결정으로 태어나 지금 여기 있다면, 존재는 자신을 위해 생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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