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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문학동네 출판

The Disappeared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은 적이 있다.

여타 다른 책의 기억들이 그렇듯이 아름다웠던 소설이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지금껏 선명히 남아있는 책의 내용은 없다.

하지만 그 어렴풋이 남아있는 좋았던 기억이 작가의 다음 소설을 읽게 만든 계기는 됐다.

모든 불러지는 작가의 다음 책들이 그렇듯이.

그러니 당연히 이 소설도 만족하지 않으며 읽었을 리는 없다.

 

 

이 책은 열 다섯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적으로는 첫 단편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분위기를 다 설명하는 듯했다.

 

 

"며칠 전 밤에 오스틴 인근 웨스트레이크힐스에서 열린 파티에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뒷마당 야외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는 옛 친구들을 발견했다.

묘한 광경이었다. 여러 해 동안 못 보던 친구들이 대부분인 데다 다들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마치 그들은 멈춘 시간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그동안 나만 다른 곳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으며 늙어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글의 느낌 그대로 전반적인 모든 이야기는 그런 빛을 띤다.

뭐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간 속에서 그게 사람이든, 기억이든 무언가를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가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듯이.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모든 단편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글은 '넝쿨식물'이었다.

 

 

넝쿨식물 단편에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친구와 영화를 전공했다가 그만둔 나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그림을 그리는 집주인인 라이어널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라이어널 집을 드나드는 젊은 여자도 등장한다.

대체로 이 이야기 역시 예술인 주변인 또는 나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읽다가 불현듯 예술을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집주인인 라이널과 주인공은 잠깐동안 이런 대화를 나눈다.

 


 

"대학에서 전공은 뭐였나?"

"영화요."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졸업은 하지 않았어요."

"왜?"

"모르겠어요." 나는 말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저 흥미를 잃은 거겠죠."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시절은 있었겠지?"

"아뇨." 나는 말했다. "전 이론 쪽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적어도 한동안은."

 

 

"자네, 뭐든 필요하면 내가 여기 바로 옆집에 있다는 걸 명심해. 알겠지?"

"알겠어요." 나는 대답했다.

"진심이야." 그는 말했다. "뭐가 필요하든."

"알겠어요." 나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라이어널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정에 의해 그만두게 되든, 스스로 그만두든, 어쨌든 모든 끝나는 관계처럼 모든 것의 끝나는 지점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런데 후에 생각해보니 라이어널은 무엇이 달랐기에 은퇴한 후에도 그림을 그렸던 걸까 하고 궁금해졌다.

그래서 마야가 그림을 그린 인물이긴 했지만 이 단편이 유달리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 밤 기온이 37도를 넘어가던 그 7월에, 어스름한 저녁 빛에 물든 라이어널의 스튜디오에서 그 그림들을 그리던 마야를 나는 기억한다" 처럼 아주 짧은 날에 일어났던 일이나 그 속에서 만난 사람도 먼 훗날에는 잊히지 않고 그런 기억한다 처럼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오래 알거나 오랫동안 일어난 일들만이 사람 생에 크게 남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만남이나 하루 동안의 일들도 크게 남겨질 수 있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사라지지 않았고, 누군가에게는 사라졌고, 또는 누군가에는 서서히 사라진다.

지속될 수 없는 것, 지속되지 않는 것 그런 감정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 좋았다.

 

 

그리고 그건 마치 '그 시절을 기억한다' 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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