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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문학동네 출판

 

 

어느 날 소설가인 주인공은 '난파선'이라는 자신이 쓴 글을 쓴 사람을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되고 한 여성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남편이었다고 하며 남편이 사라져 찾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 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이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과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

 

그리고 주인공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그가 남기고 간 일기장을 바탕으로 그 알 수 없는 사람에 관해 좇기 시작한다.

 

드라마 '안나'를 보고 원작이라고 하는 소설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거였는데 막상 소설과 드라마는 별개의 다른 이야기 같았다. 물론 드라마의 "갖고 싶은 이름, 훔치고 싶은 인생"이라는 말처럼 그 '거짓말'이라는 바탕은 같고 비슷한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소설에서는 화자로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 크게 달랐고 그 (이유미, 이유상, 엠)을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알아가는 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유상, 이유미, 혹은 또다른 어떤 이름의 그 여자.

음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그 여자는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고,

그 와중에 학생들 다수를 콩쿠르에 입상시켰다.

그녀는 또한 자격증 없는 의사였고,

또 각기 다른 세 남자의 부인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숨가빴던 그 여자의 인생에

'난파선'이 어떻게 끼어들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드라마는 각색을 많이 한 듯한데 아직 현재 시점에서 드라마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에서는 의외의 반전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끝에 가서는 '소설가의 거짓말'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혹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나는 거짓말 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스스로를 진실에서 배제시키고,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찍고, 어둡고 습한 자기혐오의 늪에 가둘 때 느껴지는 작은 쾌감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유미에게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가 동종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나를 그녀에게 이끌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들과 나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 누군가가 스푼과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 외국어를 중얼거리는 소리, 가방을 뒤적이는 소리,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 그 소리들은 하나로 뭉개졌고,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현실에는 이유미 같이 사기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도 여러 개다. 쉽게 자신을 바꿔 사람들을 속인다.

하지만 거짓말에 능통하다는 사실만을 봤을 때는 그 점이 뜻하는 바가 뭘까.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면 해서는 안 될 유해한 짓이지만 가령 소설가의 작품처럼 피해가 가지 않으면 무해한 거짓말이라 괜찮다는 걸까.

이름이 여러 개인 건 또 어떤가. 삶을 그처럼 가장하지는 않지만 우리 또한 어떤 때에는 이름이 여러 개이지 않은가.

소설의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결국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결혼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낯선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아가는 일조차 감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만을 보면 모두 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때로는 거짓으로 연기하며 삶을 사는 건 다 비슷한 처지일지도 모른다.  괜히 소설 속 화자가 작가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거짓말을 한다'는 그 사실에 관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이유미가 남긴 일기장에는 거짓말에 두려움을 느낀 듯한 글이 있었고 몇 번인가 진실을 고백하기도 마음 먹기도 했다.

아마 거짓말에 능통한 사람들이더라도 언제나 삶을 가장하고 꾸밀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마음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이어나간 거짓말을 보자면 대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결국 거짓말을 할 수 있냐 할 수 없냐는 성격의 차이이기도 한 걸까.

그래서 가령 소설가들처럼 꾸며진 이야기들도 대범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기도 할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또 뭘까.

 

아무튼 거짓말은 누구나 한다.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신은 하지 않는다고 여길 뿐이다.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었다.

 

"배경을 이용했을 때 사람들은 좀 더 쉽게 관계 맺음을 하잖아요.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있으면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관계 형성이 가능해져요. 그것에 기반해 이유미는 결혼도 하잖아요. 저는 그런 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참 사람을 쉽게 믿거든요. 그 권위가, 그것이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고요."

 

속이는 사람이나 쉽게 속는 사람이나. 그 와중에 그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소설은 술술 읽히고 어떻게 보면 여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과 드라마는 같은 듯, 다른 듯 하지만 각각의 작품으로서 궁금하다면 두 작품 다 재미있게 읽고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원작보다 드라마를 먼저 봐서인지 안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드라마가 더 매력있게 느껴지긴 했다. 그건 원작을 먼저 본 사람들이라면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나는 결국 이유미, 이유상, 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정 진짜 '나'는 어디 있는가.

 

 

"누구나 자기의 환상을 좇는 것이다."

 

 

결국, 모두 부모가 지어준 하나의 이름으로 각자 원하는 것을 찾아 자신의 환상을 좇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끼어든 누군가의 거짓말.

크게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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