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각본, 정서경 박찬욱
을유문화사 출판
영화 헤어진 결심의 각본을 옮긴 책이다.
헤어질 결심의 각본은 어떻게 쓰여졌는지 궁금했고 영화를 볼 당시 잘 들리고 보이지 않던 장면이 어떤 내용이었던건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이 산은 사람이 보지 않을 땐 걸어 다니다가 사람이 알아채면 그대로 주저앉아 평범한 산이 된다.
이 산은 너무 조용해서 나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람이 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47. 놀이터 – 서래 아파트 단지 (밤)
놀이터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은 서래, 녹색 플라스틱 양동이로 구덩이를 판다. 자동차 뒤에 숨어 지켜보는 해준. 꽤 깊이 판 구덩이에 까마귀를 조심스레 넣고 다시 양동이로 모래를 밀어 메운다. 고양이가 나타나 서래 다리에 몸을 비빈다. 서래가 중국어로 무어라 말하자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해준, 까마귀 있던 자리에 떨어진 깃털 하나를 본다.
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나는 서래, 방에 들어가면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커튼 드리우더니 침실에 불이 켜지더니 이내 꺼진다. 빨간 보자기에 싼 항아리를 들고 나오는 서래, 커피테이블에 내려놓고 앉는다. 팔짱 끼고 무릎 안는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는다. 자신을 진정시키듯 앞뒤로 몸을 흔든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상상 속에서) 서래 곁 와 앉는 해준.
해준
우는구나... 마침내.
서래의 규칙적인 몸 움직임이 해준의 잠을 부른다. 팔 아래로 드러난 서래 얼굴을 우리만 본다. 반짝이는 눈, 은밀한 미소.
18. 해준 차 안/ 월요일 할머니 집(낮)
수완
.... 무서운 여자예요, 저 반지 뺀 거 봐요.
고즈적하고 낡은 저층 아파트 단지. 차에서 쌍안경으로 관찰하는 해준. 전기 안마기를 해준 어깨에 대고 마사지해 주는 수완.
덜덜 떨리는 해준 시점 – 편한 원피스 차림의 서래. 1층 창가 안락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차 마시며 떡 먹도록 돕는다.
해준
(쌍안경에서 눈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안마기를 치우며)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해준
좋아요... 두 남편이 한 형사의 관할 지역, 그것도 멀리 떨어진 관할 지역에서 자살하거나 살해됐어요.
누가 이렇게 됐단 얘길 들었다면 난 이럴 거 같아요.
"거, 참 공교롭네..."
송서래 씨는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서래
(더 이상 담담할 수 없게) 참 불쌍한 여자네.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내려가요. 점점 내려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당신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영화와 달랐던 장면도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고 좋았던 영화인만큼 각본도 재미있었다.
각본은 드문드문 읽어본 적도 있지만 이렇게 책으로는 처음 보는 거라 일반 책과 달리 잘 안 읽힐 줄 알았는데 잘 읽히는 점도 의외였다. 이런 각본을 보고 배우들은 어떻게 연기하는 걸까.
영화를 본 다음에 본 각본이라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과 함께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은데 각본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각본, 연출, 배우들까지 모두 좋았던 영화였다.
정말 밀려드는 무언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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