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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드가, 이연식

아르테 출판

 

 

좋아하는 예술가들 역시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에드가 드가에 관해서는 단편적으로는 그의 자화상 밖에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자화상을 좋아하는 탓에 드가를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드가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 드문드문 알고 있던 내용 모두 정리되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가 그린 초상화 속 인물들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드가의 그림에서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는 가족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그림 속 가족 또한 화해하지도, 서로를 포옹하지도 못한 채 저마다 고립되어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를 소외키면서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드가가 그린 초상화는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 사이에 즐거움과 애정, 신뢰만이 오가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드가의 그림은 화면에서 인물을 절단하더라도 훨씬 짜임새가 있다. 

그의 절단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여러 명의 발레리나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줄지어 연습하는 모습을 그린 '발레 수업'은 화면 좌측 위쪽에서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발레리나들의 다리만 보이게끔 되어 있다.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연습실 한복판에서 연습하고 있는 발레리나들과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우아한 곡선과 리듬을 부여한다.

 

 

드가는 산업화와 함께 성장한 거대 도시의 모습, 도시 속의 사람들, 도시가 낳은 유흥과 구경거리를 그렸다.

인상주의는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을 향유하던 유파라고 여기기 쉽지만, 어디까지나 새로이 모습을 갖춘 대도시가 낳은 유파이고  대도시가 제공하는 새로운 감각적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다. 그런 점에서 인상주의는 플라뇌르의 예술이고, 드가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상주의적인' 화가이다.

 


 

하지만 프랑스, 플라뇌르, 인상주의 그 모두 드가가 활동했던 장소와 배경이라 흐름상 자연스럽긴 했는데 그런 글에 지면을 할애하기 보다 드가와 그 작품에 관해 더 많이 써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덕분에 다른 시각으로 드가나 파리, 인상주의에 관해 새롭게 알 수 있어 좋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도시에는 중심이 없다. 무엇이든 붙잡으려 하지만 미끄러져 손에 잡히지 않는다. 거기에는 흐름만이 있다. 플라뇌르는 도시가 제공하는 감각을 탐닉한다. 감각은 방향을 잃은 자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모든 곳을 가리키면서 정작 아무 곳도 가리키지 않는 기묘한 지표이다. 드가는 현대적인 도시를 표류하는 감각과 지표의 파편들을 포착해 예술로 그려냈다.

 

대도시에는 방향도 목적도 없고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다. 사람들은 넋이 나간 듯 돌아다닌다.

 

도시를 다니는 플라뇌르에게는 카페가 필요하다. 카페에서 플라뇌르들은 다리를 쉬고, 몽상에 잠기고, 신문이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안면이 있는 사람과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일어나서 또다시 거대한 도시로 파고들었다. 카페는 휴식처이자 지표이다. 구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지시해주는 장치다. 플라뇌르는 카페로 나가면서 비로소 하루를 시작했다. 카페가 생겨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모여서 마시고 먹고 떠들 공간을 원했다. 한때는 여관이 그런 구실을 했다.

 

19세기의 플라뇌르는 부즈루아적인 보헤미안으로서의 특권을 누렸겠지만, 지금의 우리가 파리를 방문하면 플라뇌로의 기분을 느끼기에는 조금 어렵다. 처음에 느끼는 경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명하기 어려운 압박감으로 바뀐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위예술가 마르셀 뒤샹은 파리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파리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어깨에 전통을 얹고 다닙니다." 관광객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느라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한다.

 

파리에서는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음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파리도 한때는 아찔한 변화를 겪었다.

 

 

프랑스의 관립 전시회를 '살롱'이라고 한다. 16세기부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는 예술을 교육하는 아카데미가 세워졌고 프랑스에서도 1648년에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아카데미는 엄격한 심사를 통해 회원을 뽑았다. 1667년부터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전시했는데, 이것이 살롱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팔레루아얄 등에서 열다가 1725년부터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에서 정기적으로 열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파리 살롱'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이 전시의 일등상이 로마대상이었다. 상의 명칭 그대로 로마로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하고 돌아와 궁정의 주문을 받는 엘리트 코스였다.

살롱을 둘러싼 미술계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이 체제에 잘 맞는 예술가와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을 낳았다. 살롱에서 성공했던 화가들을 '관학파' 혹은 '아카데미즘' 예술가라고 한다. 국가기관이 공인한 교육의 체계와 취향을 따르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관학파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인상주의 회화는 종교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오래되고 보편적인 감정, 숭고하고 경건한 감정에 맞닿는 내용도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상주의 회화의 등장과 득세는 미술을 판단하고 감상하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단절을 맞았음을 보여준다.

 

처음 몇 년 동안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상 뒤랑뤼엘이 일찍부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들인 덕분에 그들의 형편이 조금씩 풀렸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았기에 뒤랑뤼엘은 점점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파산 위기에 몰린 그는 인상주의 작품 300점을 꾸려서 뉴욕으로 떠났다. 미국인들은 프랑스인들처럼 인상주의 회화를 조롱하는 대신에 찬사를 보내며 사들였다. 애초에 고전적인 미술의 전통이 없었던 미국에서 신흥 부르주아들은 프랑스의 문화를 선망했고, 감각적인 인상주의 회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미국 상류층에 인맥이 두터웠던 커셋이 인상주의 회화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설파하고, 투자 상품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열심히 강조했다. 운이 좋게도 '설탕왕' 헤브마이어의 부인 루이진이 커셋의 소꿉친구였다. 헤브마이어 부부는 정력적으로 인상주의 회화를 수집했고, 이들의 소장품은 뒤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보물이 된다. 인상주의의 명성은 역수입되었고, 프랑스 대중은 느릿느릿 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였다.

 


 

결론적으로는 저자가 "플라뇌르는 익명의 존재이다. 드가는 익명의 관찰자가 되려했다. 가능한 한 자신의 특성을 없애려 했다.", "드가는 인상주의를 단순하게 정의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존재이다"라고 썼듯이 드가는 그 무엇에 속한다기보다는 정말 플라뇌르로서의 그 주변인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드가가 주로 그린 작품처럼 발레리나와 인상주의는 잘 연결되지는 않듯이 말이다.

 

 

드가가 발레리나를 그린 이유에 관해서는 여성, 후원자, 순간 등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저 겉으로 보기에는 화가에게 발레리나는 아름다운 인체 그 이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보기에도 발레리나 혹은 모델, 댄서들이 표현하는 사람의 인체는 아름답다. 예술가라면 당연히 그런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지 않을 리 없다.

 

 

아무튼 책은 북이십일 아르테 출판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에드가 드가에 관해서 알기에 좋았다. 글도 좋지만 이러한 내용은 유튜브와 팟캐스트로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관심 있으면 더 살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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