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앤의서재 출판
어른의 어휘력이라는 책 제목만 보면 꼭 어른이 써야 할 말들을 가르쳐줄 것만 같다.
책 소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80여 개에 이르는 주석에서 만나는 낱말의 사전적 정의를 통해 문장에서 다른 낱말과 함께 배치했을 때 의미나 어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접 체감하고 문맥을 이해하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그랬다. 정말 알고 보니 이 책은 그러한 소개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래서 생소한 단어에 대해 알 수 있기도 했고, 글 쓰는 방법에 관해 알 수 있기도 해서 좋았다.
하지만 나는 맞춤법이나 오타를 지적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말과 글은 어느 정도 의미만 통하면 된다고 느슨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다소 껄끄럽게 읽힌 것도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보면,
"나는 한갓진 게 좋고 잠포록한 날씨를 좋아하고 어둑발 내려앉는 시간을 좋아하며 새물내를 좋아하고 얕은맛을 좋아한다."
이처럼 책에 적힌 수많은 단어는 없는 단어는 아니니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일상에서 쓰기에는 힘들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내 "이런 말을 누가 써?" 싶기도 했다.
글로 적는다고 해도 이 책에 쓰인 일부 단어를 알고 편히 읽을 사람은 내 생각에는 드물다. 혹은 그러한 단어들은 마치 전문가들이 쓰는 말처럼 알은체하는 글이 되기 쉽다. 그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이 그 이상의 단어를 앎에도 독자가 읽기 편하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반면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글은 이런 것이다.
말 안 하면 왜 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어른의 세계에서는 미지의 언어를 눈물과 울음 등으로 증폭시키는 사람보다 합당한 언어로 정렬해 승화시키는 사람이 훨씬 미덥다. 언어는 사용한다는 것은 간단한 표현이라도 고도의 두뇌활동이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고 싶다면 갖지도 않은 독심술을 부리지 말고 말(글)을 건네자. 그 말(글)이 가진 힘을 믿자.
우리가 어휘력을 키우고 싶은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 소통에 있지 않던가.
당신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써봐야 안다. 글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탁월한 효과 중 하나는 생각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으나 어떤 글이 못 쓴 글인지는 말할 수 있다. 수식어를 남발하거나 요란한 글은 못 쓴 글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줏대가 없는데 있는 척해서다.
"살아남은 나....
나는 다이아."
"내부에서는 잠들어 있고 외부에서는 붉어지고 있다."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
"모든 사물을 데면데면 보지 말고 친절하게 봐라."
우리나라 사전은 황야를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 풀이하는데, 내가 체감한 황야는 인간이 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간의 것일 수 없는 땅이다. 거친 들판이라기보다 야성 그대로의 들판이다. 인간 없이 온전히 자기네 서사로 무궁한 곳이다.
'아름답다'는 어휘는 햇살 좋은 오후, 해변을 거닐다 발견한 입 꾹 다문 하얀 조가비 같다.
나비의 날갯짓이 대끝에 모였다.
물론 책에서 말했듯이 "고속도로에서 돈 받는 데 있잖아. 근데 사람이 없는 거야. 차에다 뭐 달면 거기서 요금 빼간다던데 그걸 안 달아가지고 못 내고 지나가버렸어"보다는 "톨게이트에서 하이패스 전용차로로 들어서는 바람에 통행료를 정산하지 못하고 통과해버렸어. 내 차에 하이패스 단말기가 없거든"가 훨씬 어휘력으로 봐도 좋아 보인다.
당연히 "너의 나라 바다는 무슨 색이니?" 같은 물음에도 정확히 보고 적합한 언어로,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하면 어떻고, 저렇게 말하면 어떨까 싶다. 굉장한 언어 파괴범처럼 쓰고 말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나는 굳이 알은체 하는 단어를 써서 적힌 글도 싫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말로 일상에서 소통하는 것도 싫다.
다른 예를 보면,
A : 5월 초하루, 메이데이는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B :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고 안정된 삶을 도모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이다.
저자가 적었듯이 "어휘의 양은 B가 풍부하지만 현실감 있게 머리에 들어오는 문장은 A다." 이어진 설명처럼 법률가라면 A보다 B가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어휘일지 모르나 내 생각에 대개 B 같은 문장은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책에 소개된 단어들로 글을 짓는다면 그 또한 어려운 단어는 아니나 알은체하는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저자가 언어를 사랑하는 마음과 다르게 다소 껄끄럽게 읽혔던 것 같다.
책의 시작에 이런 글이 있었다. "그 책을 읽으면 어휘력이 느는 거야?" 아쉽게도 나는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저자의 생각과 달리 책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독자의 어휘력보다는 작가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책에 적혀 있던 이런 방법을 적용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가 한 훈련 방식은 내게 생소하지 않았다. 나 역시 초년에 비슷한 방식으로 글쓰기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 비디오를 보면서 A가 대사를 하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B의 예상 대사를 쓴다. 다 쓴 후에 재생 버튼을 눌러 실제 B의 대사와 비교하면서 혼자 웃고 아쉬워하고 그랬다. 이런 훈련은 어휘의 양을 획기적으로 늘리진 않지만 상황에 따른 어휘에 민감해질 수 있게 한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네? 아, 그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등으로 표현의 다양성에 눈 뜰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글이 좋은 글인 것은 알겠다. 전반적으로 꼭 집어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나 분명 좋았던 글들이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껄끄럽게 읽힌 부분도 크게 다가와서 책의 인상으로만 말하자면 '좋은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에 관해 생각하고, 많은 단어들을 알고 어휘력을 늘리고 싶다면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많은 단어들도 책의 말을 다르게 빌리면 나에게는 "반응만 남기고 떠나버렸다"이지만 분명 그것들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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