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한다는 착각, 닉 채터
웨일북 출판
The Mind Is Flat: The Remarkable Shallowness of the Improvising Brain
영국의 행동과학자가 쓴 책으로 제목 그대로 마음은 평면이라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책 소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책이기도 하다.
"저자 닉 채터는 베일에 가려진 심오한 마음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다고 주장한다.
내면의 믿음이나 가치, 욕망이라는 것은 딱 정해진 무언가가 아니라 과거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오늘의 기억은 어제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내면 기저에 있는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아서 행동한다기보다 스스로 계속해서 정체성을 만들고 끊임없이 즉흥적으로 행동한다."
책의 내용은 그 내면은 없다는 견해 아래 처음에는 흥미롭게 읽힌 부분도 있었지만, 계속 그 견해를 뒷받침 하는 내용들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뒤에는 고루하게 읽히기도 했다.
따라서 결론만 놓고 보면 굳이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생각한다는 착각이라는 책 제목에 속은 기분이기도 하다. 흥미로워 보이는 책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이유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번역 탓인지, 내용 탓인지 몰입해서 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책에서 기억에 남았던 글은 다음과 같다.
안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화가이자 유명한 북디자이너인 피터 멘델선드는 톨스토이가 안나의 짙은 속눈썹과 윗입술 위에 난 보드라운 솜털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키가 큰가, 작은가? 머리카락은 금발인가, 빨강인가? 눈은 푸른가, 갈색인가?
믿기 어려운 점은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너무 말을 아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를 눈치채지도 못했으며 더더군다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누군가는 문학 소설이 등장인물의 외모를 다루는 것이 아닌, 내면을 다루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안나의 정신은 몸만큼이나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안나는 정확히 어떤 유의 인간인가?
우리는 안나를 여러 방식으로 '읽는'다. 안나는 다양한 강도와 조합을 통해 비장하거나, 강박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반항적이거나, 거칠거나, 억압당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냉정한 여자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개방성은 당연하게도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안나의 특성이 소설 본문에 의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안나의 동기에 관한 진실은 소설 속 안나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단어 연상과 꿈의 분석, 뇌 촬영은 결코 한 사람의 '진짜 동기'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진짜 동기를 찾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찾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톨스토이의 뇌가 창조해 낸 소설 속 안나는 피상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이지만 현실의 안나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 뇌가 만들어낸 피상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일 것이다.
검은 점이 몇 개나 보이는가?
당신이 찾아보는 동안 검은 점은 계속 깜빡이며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다. '니니오의 소멸 착시'라고 부르는 이러한 착각은 프랑스의 생물학자이자 시각과학자인 자크 니니오가 만들었다. 격자를 가로질러 눈을 움직일 때, 당신은 바라보는 곳마다 하얀 색 점으로 된 조각이 보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매우 불안정하지만 근접한 한 쌍의 점이나 선, 삼각형, 심지어 사각형까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주의력은 충분치 않기에 주의해서 보지 않는 부분의 점은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한 번에 한 단어, 사물, 또는 색깔을 처리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사물과 장면에 관한 어머어마한 양의 정보를 일제히 기억 속에 쌓아두진 않지만, 그냥 필요한 때에 이용 가능한 시각적 경험에 대한 어떤 질문에든 답을 가지고 있다.
잠시 당신의 '내면의 호랑이'가 지닌 줄무늬를 떠올려보자.
호랑이 줄무늬는 무엇인가?
호랑이가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호랑이에 대한 마음속 그림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분명 호랑이에 대한 나의 미약하고 불명확한 심적 이미지에는 그런 그림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호랑이가 상당히 위험하게 당신 바로 앞에 서 있더라도, 일단 호랑이 털의 주황빛 색깔에 주목했다가, 그 커다란 턱이 하품하듯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면 호랑이가 쭉 내민 앞발의 엄청난 크기에 주목한다.
우리는 우리가 처리하는 이미지의 부위만 인지할 뿐, 그렇지 않은 부위는 인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쿨레쇼프 효과. 애매한 얼굴 표정의 해석은 다양한 장면을 삽입했을 때 극적으로 바뀐다.
우리는 얼굴에 나타난 감정과 얼굴 자체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맥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맥락의 힘은 분명 어는 곳에나 존재하는 지각의 특성이다.
우리의 기분은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대신에 기분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비춰 현 신체 상태의 피드백에 대해 뇌가 내놓는 최고의 순간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결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행동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다른 누군가의 해석만큼이나 불완전하고 뒤죽박죽이며 반박의 여지가 있다.
내면세계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진실은 그 깊이가 공허하다거나 얕다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이 전부라는 것이다.
마음속에 숨겨진 미리 형성된 신념과 욕망, 선호, 태도, 심지어 기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평면이다. 그 표면이 그곳에 존재하는 전부다.
숨겨진 깊이 즉 내면세계와 그 세계가 포함하는 신념, 동기, 그리고 두려움은 그 자체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어쨌든 고정된 자아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도 무관하다는 느낌이 드니 마치 그래서 '매 순간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로 보이는 저자의 결론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정신세계로부터 숨겨진 냉혹한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생각과 행동이 변신한 것이고,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어떤 선례를 고려하고 어떻게 변형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결정적인 재량권을 가진다. 오늘날의 생각과 행동이 내일의 선례인 것처럼, 우리는 말 그대로 순간순간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재창조한다.
문화 역시 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별도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자아'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며 놀라우리만큼 연약하다. 우리는 그저 가장 가볍게 그려낸 문학적 창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우리는 너무나 안정적이고 일관성 있는 삶과 조직과 사회를 구성한다. 계속적인 재창조라는 개념은 일단 속임수가 드러난 뒤 우리의 행동을 개인으로서나 사회로서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척도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특히 혼란을 유발한다. 결국 우리가 설 수 있는 단단한 기반 같은 것은 없으니까. 새로운 생각과 가치, 행동은 그저 과거 선례의 전통 안에서만 정당화되거나 비판받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선례가 적용되고 어떤 선례가 주도해야 하는지는 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뭐든지 가능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인생과 사회의 구성이 본질적으로 제한이 없으며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의미다. 또한 우리가 결정과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동일한 창조적인 과정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컨대 인생은 우리가 참가하고, 규칙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점수를 지키는 경기다.
마음이 평면이라면, 우리가 마음과 삶과 문화를 상상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감동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또 현실로 이뤄낼 힘을 지닌 셈이다."
그러나 그걸 알기 위해 굳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그건 글쎄... 라는 생각이 든다.
뇌와 감정, 기억에 관련한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익숙한 내용들인데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그 사실이 얼마나 개개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싶었으니 말이다.
정작 사람의 지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비단식 일기 (0) | 2023.02.01 |
---|---|
클루지 (0) | 2023.01.30 |
IT 좀 아는 사람 (0) | 2023.01.22 |
누구나 그릴 수 있고 어디나 써먹을 수 있는 막대인간 드로잉 (0) | 2023.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