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지, 게리 마커스
갤리온 출판
Kluge: The Haphazard Evolution of the Human Mind
미국의 심리학과 교수가 쓴 진화와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오래된 위에 새로운 위가 얹혀 있는 형태로 진화되어 왔으며, 마치 오래된 뇌가 하는 사고가 본능적인 반사 체계라면 새로운 뇌가 하는 사고는 이성적인 숙고 체계이다.
하지만 이미 '확증 편향, 정신적 오염, 닻 내리기, 틀 짜기, 부적절한 자기 통제, 반추의 순환, 초점 맞추기 착각, 동기에 의한 추론, 잘못된 기억, 제한된 정신 능력, 애매한 언어 체계, 정신장애에 대한 취약성' 등등의 합리적이지 않다고 알려진 많은 인간의 사고에서 알 수 있듯이 반사 체계와 숙고 체계의 균형은 불완전하다.
즉 진화는 불완전하며 인간 또한 그 진화의 산물로서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예는 책에서 말한 많은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100달러짜리 전자레인지를 살 때는 25달러를 아끼려고 기꺼이 시내 반대편까지 차를 몰고 간다. 그러나 1,000달러짜리 평면 텔레비전을 살 때는 똑같은 액수를 아끼려고 똑같은 거리를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퇴근하면서 식품점에 들러야지 하고 생각했다가도 어느새 그것을 완전히 잊은 채, 그냥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곤 한다. 이것은 빈번한 행동(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기)이 최근 목표(우유를 사오라는 아내나 남편의 부탁)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왜 인간들은 꼭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도 어리석게 많은 시간을 배회하는 것일까?
놀라운 것은 극성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조금만 보는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덜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단기적으로 몇몇 이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텔레비전 시청에 소비한 시간은 운동, 취미활동, 아이들 돌보기, 타인들을 돕기, 친구 사귀기 등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날려 버린 셈이다.
밥 메릴의 유명한 노래 "창가의 그 개는 얼마인가요?"라는 질문을 생각해보라. 잘 키운 개 한 마리가 도대체 얼마의 가치를 지니겠는가?
사람들은 종종 문제의 개보다 파는 사람이 떠드는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그래서 개를 키운 사람이 600달러의 값을 부르면 고객은 500달러로 깎아내려 개를 산 뒤에,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00달러를 지출할 때 25달러를 절약한 것은 좋은 거래로 보이는 반면에 1,000달러를 지출할 때 25달러를 절약한 것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로 보인다. 경제학자의 냉철한 눈으로 따지자면 1달러는 1달러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돈에 대해 다소 덜 합리적인 방식으로, 곧 절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충분히 익숙한 내용들이기도 하다.
물론 책의 내용은 그게 다가 아닐 수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렇게만 보여서 저자가 끝에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는 내용(클루지를 이겨내는 13가지 제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 제안이 이 책을 읽기 위한 목적이라면 다소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 설명을 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특히 맥락, 기억, 신념 등이 그렇다.
왜 연예인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까?
기억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것들을 정돈하기에 적합한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의 인출은 맥락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는 기억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우리 인간은 한 조각 정보가 정확히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아주 막연하게 '뇌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또는 전혀) 알 수 없다.
맥락이 바뀌면 기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간의 기억에서 맥락은 결정적인 것이다.
무엇이 머릿속에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가는 맥락에 따라 좌우된다.
어떤 것을 계속 반복해서 외우는 것은 기억을 돕기 위해 고안된 가장 오래된 방법이라고 할 만하지만, 이것도 결코 세련된 방법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기계적인 암기가 꽤 효과적인 까닭은 이것이 자주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탕으로 기억에 접근하는 뇌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지만, 이 방법 역시 매우 조야한 것이다.
우리에게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기억이 필요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마치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뿐이다. 다시 말해 우편번호 기억과 비슷한 클루지를 만들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기층 위에 덧씌우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잊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싶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신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고 부호화하는 객관적인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계획적인 진화의 흉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며, 감정, 기분, 욕구, 목표, 사리사욕 따위에 오염되어 있다.
내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사람들이 유명한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기보다, 친숙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편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이 알았고 또 그를 해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가 몰랐던 것(그리고 어쩌면 그를 해칠지도 모르는 것)보다 안전한 것일 확률이 높다.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행동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 속에서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선택된 것일지 모른다.
예컨대 우리가 (거창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어떤 이론을 믿고 있다면, 그것을 위협할지도 모를 증거보다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가 우리 눈에 더 잘 띄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기억을 끄집어 낼 때 컴퓨터처럼 모든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치하는 것들을 찾는다.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갖고 있던 생각을 확증하는 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목적은 증거에 대해 균형 잡힌 접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론을 확증하는 증거에 주의가 쏠리기 마련이다. 과거의 과학서적을 읽다보면 우리는 천재뿐만 아니라,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지구가 편평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나 연금술사 등)도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이런 허구를 믿은 과학자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인간처럼 맥락 의존적인 기억을 지닌 종에게 이런 오류는 늘 존재하는 위험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나는 주변에서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연구를 접하면 필사적으로 그것의 흠을 잡으려하는 과학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진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도록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때는 이런 불일치를 그냥 지나친다) 동기에 의한 추론과 확증 편향이 없다면 세상은 전혀 딴판일 것이다.
'믿다believe’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다"라는 정의와 "특히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다"라는 정의가 나란히 적혀 있다. 과연 신념은 우리가 참이라고 아는 것일까 아니면 참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하여 과학, 이성, 합리성을 믿는 자들이더라도 '결국 과학자들도 사람이다'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듯했다.
어쩌면 그 부분은 누구나 놓치고 있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말하는 클루지란 무엇인가.
클루지란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뜻한다. 또는 "공학자들이 결코 완벽하지 않은 엉성한 해결책을 가리킬 때 쓰는 통속적인 표현"을 뜻한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옮긴이의 글로 쉽게 설명하면,
"진화란, 마치 뛰어난 공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진화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당장 그런대로 쓸 만한 해결책이 발견되면, 그것이 선택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또한 엉성한 해결책인 클루지의 진화 과정을 밟은 우연과 진화의 산물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클루지를 만들까? 그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이러하다.
공학자들은 대개 돈이나 시간을 졀약하기 위해서 클루지를 만든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클루지를 만들까?
자연은 쉽게 클루지를 만들곤 한다. 자연은 그것의 산물이 완벽한지 또는 세련됐는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작동하는 것은 확산되고 작동하지 않는 것은 소멸할 뿐이다.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유전자는 증식하는 경향이 있고,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는 생물을 낳는 유전자는 사라져버리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은유다. 이 게임의 이름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적절함이다.
최적화는 진화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진화 속에서 '생길 수 있는 결과'일 뿐이다. 그저 진화가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자연은 완벽하지 않고, 인간 또한 그렇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기에 그렇게 불완전한 자연이, 사람이, 자신이 때로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밤늦은 시각에 인터넷에 접속할 기회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여기(2차 세계대전)를 클릭하고, 저기(이오지마)를 클릭한다.
노골적인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의 창작과 감상을 위해 시간을 쓰느니 겨울을 위해 호두를 모으는 데 시간을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예술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즐거움의 일부다. 우리는 기꺼이 애매함을 바탕으로 시를 짓고 감정과 비합리성을 바탕으로 노래와 문학을 창작한다.
'해리 스토틀마이어의 발견'은 주인공 해리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에 대한 수필을 쓰라는 과제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소년인 해리는 생각에 대해 수필을 쓰기로 작정한다.
"나한테 세상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생각하는 것이지. 물론 나는 전기, 자기, 인력과 같이 다른 많은 것들도 매우 중요하고 놀랍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하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생각이야말로 매우 특별한 것일 거야."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영화 비평가도 아니다. 때문에 이런 정보가 내게 쓸모 있게 될 개연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나는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좋아한다.
이에 덧붙이면 "내 뇌는 나를 좀 더 까다롭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배선되어 있지 않다"는 저자의 글대로 그런 뇌가 좋다.
당연히 결론으로 보면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겠지만 불현듯 모든 것이 완전하고 완벽하기만 한 세상이라면 더 이상 밝혀낼 것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따라서 이 책도 어느 결론보다 그 과정을 즐긴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라 별 기대 안 하고 읽은 것치고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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