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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가 없다'

출처 : aladin.co.kr / amazon.com

 

쥐스킨트의 단편 글 중에 깊이에의 강요라는 글이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한 비평가의 비평에 꽂힌 예술가가 스스로 피폐해져 가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깊이에의 강요로 출판되었고 원제는 '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ung'의 Der Zwang zur Tiefe 제목으로 실려 있다.

 

평론가의 글 처음과 끝은 이렇다. 그 사이 주인공의 죽음이 있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2002년)

 

중간에 사람들의 평도 있다.

 

출처 : pexels.com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

 

 

그리고 이 단편 소설은 읽는 이의 첫 느낌 그대로 대체로 예술가를 극한으로 몰고 간 평론가의 비평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읽는 이의 시점에 따라 평론가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그랬으므로 "그 예술가의 작품은 정말 깊이가 없었나 보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휩쓸린다. 특히 내가 알지 못할 때는 더 그렇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들의 의견도 단지 평론가의 견해에 따라진 것이었다면?

 

출처 : Patrick Suskind / freepik.com

 

어쨌든 이 이야기는 모호하게 끝나므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나를 가만히 놔두시오라고 말했던 '좀머 씨 이야기'도 그렇고 쥐스킨트 글 중에는 그런 모호한 면을 가진 이야기가 많다.

마치 작품도 알려진 것 없이 베일에 싸인 작가의 모습처럼.

 

그런데 여기서 알고 싶은 바는 "도대체 깊이가 뭔데?" 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이야기는 평론가보다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환대받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처 : pexels.com

 

깊이있는 예술

사실 누가 평하든 그것은 기준이 없다.

소설에서 주인공이었던 그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에는 어떤 깊이가 있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 했던 것처럼 누가 그것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을 이어 상상해보면 먼 훗날 저명한 또 다른 누군가 나타나 그녀에 그림에는 깊이가 있다고 평했다면 사후에 그녀가 다 빈치 처럼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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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예술이란 참 이상하다.

하지만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썼든 이 이야기는 깊이 있는 예술을 숙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빼어나다.

즉,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설명하기는 어려운 감각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예술가보다 그렇지 않은 예술가를 좋아하는 편이라 높이 평가한 탓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깊이에의 강요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출처 : amazon.com

"도대체 깊이가 뭔데?"

 

그런데 다시 읽어보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그녀에게도 잘못은 없지 않다 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좀 더 스스로 "나는 깊이가 있어!" 하고 뻔뻔할 필요도 있었던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대중은 부끄럼 많은 예술가보다 자신만만한 예술가를 더 사랑하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미처 알 세도 없이 평범하게 살다 생을 마감한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니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뻔뻔함은 예술가에게 필수 요소일 수 있다.

 

출처 : books.google.co.kr

 

그나저나 쥐스킨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면식도 있을리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깊이에의 강요를 써줘서, 또는 좀머 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좋아하는 그의 근황이 궁금하다.

부고는 없는 듯하지만 건강히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작가이기는 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향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깊이'가 그런 것이라면 좀 더 깊이에의 강요보다는 '깊이'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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