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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 좌절의 시대

 

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문학동네 출판

 

 

작가가 2016년부터 2024년까지 일간지와 잡지 등의 매체에 쓴 칼럼을 모아 산문집으로 엮어낸 책이다.

‘미세 좌절’은 장강명이 새롭게 고안해낸 조어이다. 국가가 장기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기업은 여러 경영 방식을 택하지만 정작 시민 개개인은 그러한 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실패를 겪는다. 이 만연한 실패의 감각을 작가는 ‘미세 좌절’이라고 명명한다.

 

책은 크게 혼미한 시대,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우리는 삶을 통째로 긍정해야 할까, 삶이 얄팍해지지 않으려면 등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작가의 뜻대로라면 '매사에 회의적인 사람이 점점 불확실해지는 시대 앞에서 스스로 던진 막연한 질문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개글의 미세좌절이라는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한국 사회의 정부와 정치, 구조, 시스템에 관한 글이 많아 부드럽기보다는 날카롭게 읽히는 인상의 글이었고, 그동안 작가의 책을 몇 번 접하면서 전직 기자였던 소설가라고 여기면서 읽은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런 면이 잘 인식되는 듯했다.

 

물론 어느 작가의 작품을 접하든 그 이력을 염두에 두고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줄곧 작가의 책도 전직 기자여서 이런 글을 썼구나 하고 읽은 적은 없다. 있다한들 사회에 관한 글을 많이 쓰는구나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불현듯 저널리스트 출신의 소설가답구나 같은 생각이 떠올라서 의외였다.

특히 정치와 관련한 글에서는 놀라운 부분도 있었다.


 

 

내가 이해하는 보수와 진보는 방향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에 대한 것이다.

가야 할 방향은 명확히 정해져 있다. 경제의 역동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안전망도 튼튼한 사회.

 

마음이 급한 이들은 빨리 달리자고 한다. 겁이 많은 이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자고 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진보와 보수의 건강한 논쟁이고, 나는 겁이 많은 쪽이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주의는 현실주의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이런 비유에 동의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현실을 살피자는 목소리를 낼 때 '타협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면 현실과 타협하지, 무엇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이상과 타협하라는 건가?

이상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에서 말하는 보수, 진보의 정확한 개념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단어부터 떠올려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나 흔히 일상에서 말하는 나는 보수적이야 할 때를 보면 우리가 말하는 보수는 전통을 중시하는 것이 맞는데.

나는 진보적이라고 해도 전통과 안전은 무시하고 먼 미래만 지향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오히려 진보가 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생각하듯 속도, 현실, 합리성, 이성의 문제라고 한들 우파, 좌파로 보면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래서 만약 보수주의자가 우파라서 그렇다면 그건 정말 '너는 가진 게 있으니까 급하지 않은 거야, 너는 당해보지 않아서 서럽지 않은 거야'에 걸맞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이유로 정확히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쓰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어느 쪽이든 자가당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돈은 현실이다.

현실을 외면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진정 '돈'이라는 그런 속내는 감추면서.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을 믿으면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그저 먹고 사는 일 그 앞에서 다들 갈팡질팡 하는 느낌도 든다.

아니면 그저 다를 자신 편의대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는 게 한국 사회 특징인 건지.

도덕적으로 지키면 법이고, 상황에 따라 어기면 융통성이고.

 

 

그렇다고 해도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이나 교육이 다 바르다고 볼 수 있을까.

애당초 그 믿음의 본질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니, 변화와 발전 속도만 빠르기만 하면 뭐할까.

정치와 사회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그러니 그 지점에서 시민으로서 '어떻게'는 모르겠고 답답함만 느껴질 따름이다.

 

여하튼 그 맥락과 의미는 다르지만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문학이나 예술의 언어는 설득이다.

 


 

다음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시시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같은 사소한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

 

소설가라는 직업 덕분에 자주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에서부터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영웅 서사의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서 극적으로 변신한다.

서사의 완결지점을 알게 되면 할 일이 생긴다. 비극적 결단이든 영웅적 도전이든.

그 순간 존재의 의미를 둘러싼 고뇌도 해소된다.

때로 사회 차원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혼미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다.

막연하게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감성적인 구호 이상의, 길고 차분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논리로 풀지 못한다.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다 같이 시시해졌다고.

 

 

어떤 신념과 정의감은 디테일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사회 비판, 어렵지 않다. 책 몇 권 읽으면 아무나 할 수 있다. 정밀하게 팩트를 챙기는 게 기자의 실력이다.

세상을 고해상도로 봐야 복잡한 현실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해상도를 낮출수록 만사가 선악의 대결에 가깝게 보인다.

악마만 디테일에 있으랴. 모든 게 디테일에 있다. 그러므로 디테일을 알아야 한다.

디테일은 넓고 많고 다채롭고 일견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노력도 많이 든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디테일을 조사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우리는 '공부'라고 부른다.

 

한 취향 공동체가 주관적 체험들을 모아 논의하고 합의해 쌓아올린 미학의 체계가 있다.

그 축적물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 감상을 공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곳의 언어는 훈계가 아니라 설득이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문학의 언어로 해석하면 사회도, 개인도 그런 과정과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좀 더 디테일한 맥락과 공부가 필요하다면 이 사회를 살펴보기에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추천할 수 있을 법한 책이었다. 그리고 관심이 가면 전체적으로 읽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적어도 현시점까지의 인터넷은 빠르고 짧은 정보를 선호한다.

디바이스도, 플랫폼도, 매체도, 이용자도 그렇다.

'빠르고 짧다'는 표현은 어쩌면 동어반복인데, 인터넷 세상에서 어떤 정보가 빨리 전파되려면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지식은 대개 짧지 않다.

지식이란 정보들이 논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구조물이다. 깊은 지식일수록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하다.

따라서 문맥이 중요하다. 책 한권을 문장 단위로 분절해서 마구 흐트러뜨린 뒤 순서 없이 읽는다면, 그 책의 모든 글자를 다 본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는 내용은 아주 적을 게다.

그게 인터넷이고 소셜 미디어다."

 

진정 이렇게 본 글도 감자칩 같지 않으려면.

그러나 결국 책은 책이고, 작가는 작가이기에 그 정직이 크나큰 냉소로 다가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든 글을 공론장에 제출한다고 생각하고 쓴다.

인간 본성과 세상의 시스템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믿는 바를 쓰면, 독자들은 그게 너무 어둡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이다.

 

물론 한국에 살면서 이 정도의 정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실과 달리 오해받으면 그 누구라도 좋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오해 받기 싫은 탓에 어느 쪽으로 쉽게 냉정해지지도, 뜨거워지지도 못하는 게 개인의 삶이나 사회에는 방해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문학에 기대하는 바는 위로도, 냉소도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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