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가받으며 사는 것의 의미, 지야드 마라
현암사 출판
Judged, Ziyad Marar
평가에 대해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다만 시종일관 평가는 벗어날 수 없다는 듯한 주장의 내용은 다소 회의적으로 읽히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읽고 난 후에는 그 말을 부인할 수 없기에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읽고자 한다면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물론 흘깃 제목만 봤을 때는
"내가 평가 받으며 살 일이 뭐가 있어?"
"유명인을 위한 책 아니야?"
같이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책, 아니다.
게다가 그 평가의 의미를 나를 둘러싼 평판, 소문, 판단 등으로 인식하고 보면 달라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성이나 악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지만 누구든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친구, 가족, 동료들에 의해) 이야기되고 또 몇가지 평판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날 일 없는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노출되거나 인기를 구해야 하는 경우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소규모 고정 관객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기술을 발휘하고 노력을 쏟아야 한다.
시험을 치르는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시험은 자존감과 연관되어 그 결과에 따라 아이가 자신감을 갖게 될 수도, 또 잃게 될 수도 있다.
직장에서 관계란 권력과 돈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평판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더 높다.
직장에서 신뢰를 잃는다는 건 실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무실에는 은폐가 넘쳐난다.

"네가 과카몰리를 내게 주면 무척 기쁠 것 같아."
간단히 "과카몰리 좀 건네줘"라고 말하면 될 것을 "네가 과카몰리를 내게 주면 무척 기쁠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언어는 투명한 소통의 창이지만 사람들은 간접화법을 사용하거나 교묘하게 표현하는 것 혹은 행간에 여운을 삽입함으로써 영리하게 의도를 감춘다. 사회적 환경에서 언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몸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디지털 세상에는 실제 일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의 모습에 대해 더욱 치열하게 소통하고 평가하게 된다. 사람들은 온라인 활동에서 중요한 건 타인과의 관계 및 연결성, 정보 수집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작 온라인 활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희망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우버에서 내릴 때 별점을 매겨 운전사를 평가하게 되어 있지만 운전사 역시 당신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듯 가까운 가족부터 친구, 시험, 직장, 디지털 세계, 하물며 오늘 하루 스치듯 만난 운전사까지 인간은 모든 사람을 평가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평가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거나 무가치하게 여기면 자신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다.

'날 평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누군가 나를 뜯어보면서 부족하다고 결론짓는 게 불편한 것에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 똑같이 복수하고자 나 또한 당신을 평가하게 된다.
"대체 당신이 뭔데 그러는 거야?"
남들의 가혹한 시선에서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든 내버려둬', '각자 사는 거지'라는 말 뒤에 숨어 버린다.
하지만 남들의 평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전혀 평가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타인은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기여한다.
기쁨, 선의, 정보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자아상과 자존감 형성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당신 편'으로 분류되어 있던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갈채와 칭찬을 보내도 당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의 평가에는 사회적 고통의 위험이 동반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소식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가 마땅한 무게를 지니려면 고통스러운 비판의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평가를 꺼려하는 것은 나쁜 평가를 받을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칭찬보다 조언, 충고, 비판이 넘쳐난다.
해결된 문제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다.
더더욱 나를, 당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무정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가 다정하게 대하더라도 곤란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곤란함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다양한 관계에 무의식적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회적 관계에 능숙한 이들도 곤란함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곤란함은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 상대에 따라 얼굴 빨개질 일을 면할 수도 있지만
만약 상대방이 무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면 처참하게 궁지에 내몰릴 수도 있다.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으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친한 동료와 인사할 때 악수할지 입 맞출지 아니면 포옹할지, 열차에서 임신부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오로지 혼자만의 판단이 아니다.
순조로운 상호작용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렇듯 평가는 불공평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기분 좋지 않은 면이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듯이 위험을 수반한 나쁜 평가는 때때로 좋은 평가보다 가치가 있다.
좋은 평가만 있고 나쁜 평가가 없다면 그 평가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만 말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익히 알겠지만 오로지 어리석은 사람들만 솔직함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판단이란 긍정과 부정이 균형있게 존재하는 평가다.


그렇다면 좋은 평가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저자의 통찰에 따르면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선량함과 유능함이 다 필요하다.
피스케에 따르면 사람들은 보통 경쟁력보다는 따뜻함을 좀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쟁력이 부족할 때 불편한 건 주로 자신뿐이지만 따뜻함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진다) 실제로는 따뜻함과 경쟁력을 모두 갖추고 있을 때 가장 높은 평판을 누리게 된다.
아무것도 숨길 게 없고 나의 동기는 순수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다 보면 결국 업무 처리 능력, 경쟁력 같은 핵심 역량에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의도는 좋지만 경쟁력이 없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경우는 의외로 많이 벌어진다.
선량하면서 경쟁력까지 갖추기는 즉,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면서 냉정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판을 높이고 싶을 때 우리는 이 선량함과 경쟁력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평가는 기분 좋지 않은 것이므로 여전히 당신이 뭔데? 같은 마음이 들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평가가 중요하다 치더라도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들의 평가까지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가의 이면에는 희망이 있다.
관찰자, 즉 타인 역시 믿을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점이다.

당신이 도덕적이든, 유능하든, 둘 다든, 둘 다 아니든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관찰자의 시각은 신뢰할 만한 게 못 된다.
평가는 편향적이고 이기적이며 상대방의 사회적 자아가 변화하면 함께 달라지기도 한다.
인간은 객관적 입장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평가를 그만둘 수도 없을 뿐더러 공정하거나 정확한 평가를 받지도 못한다.
결국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공정하거나 중립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불공평함이 몹시 괴로운 수준이 되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신경 안 써" 혹은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힘들겠지만 이것이 모두의 공통된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또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굳이 오해를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또 뭐지?
사실 이유는 없다. 내가 조금 나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래서 결국 이 책의 의미는 항상 사람들로부터 평가 받을 수밖에 없고 그 평가 또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취지로 보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갈수록 비슷한 내용과 견해에 지치고 말았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라 말할 수 있다.
대신 저자인 지야드 마라의 출판 분야 이력 탓인지 평가에 관한 내용 중 문학의 예가 많아 책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그것은 강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사실 평가는 어찌할 수 없다로 읽혀서 그렇지 평가의 의미를 통찰해 보기에는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어쨌거나 크게 신경쓰든 신경 쓰지 않든 평가라는 것은 관리할 수 있는 것의 차원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러므로 오해, 평가, 판단, 비판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응하고 여기는 게 중요하다.
세상에 오해받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는 면에서,
하물며 생을 마친 사람도 그렇다는 면에서,
인간은 피차 다 마찬가지인 처지라는 점에서.
너도 오해하고 나도 오해한다.
사실만큼 오해도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데 애초에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데 완벽한 평가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그렇기에 단지 이러한 마음만 애석할 따름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애처로운 허세라고 여길지라도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계획,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거라고 믿는 프로젝트를 갖고 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새뮤얼 존슨의 이 같은 통찰은 씁쓸하다.
이런 계획이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아니 도리어 가혹한 비평이나 무관심에 직면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약한 공상가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그저 싸늘한 반응에 둘러싸일 뿐이다."
나약한 공상가.
그저 바란 건 계획의 실현, 수고에 대한 너그러운 평가 정도였을 텐데.
'몹쓸 정체성'만큼이나 애처롭다.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인간의 평가 자체가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평가에 흔들리는 나약함 역시 자신에게는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을테니.
게다가 무모한 공상가가 승자로서 역사를 쓴 일이라면 그 점은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더 억울한 일이 될 수 있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뇌의 하루 (0) | 2025.12.06 |
|---|---|
| JOBS - NOVELIST (잡스4: 소설가) (0) | 2025.11.21 |
| 저소비 생활 (0) | 2025.11.07 |
| 이적의 단어들 (0) | 2025.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