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 되는 법, 한소범
유유
책 제목이 '독자 되는 법'이어서 좋은 독자 되는 법 또는 바른 독자 되는 법에 관해 알려주는 책인 줄 알았지만 그런 책은 아니었고, 저자가 독자로서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을 글로 쓴 책이었다.
책 소개에 따르면 '바빠도 끝내 읽는 사람, 한소범 작가가 전하는 일상에서 독서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는 생활의 노하우. 특정한 독서법을 넘어, 바쁜 틈에도 자연스레 읽는 기쁨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과 경험을 솔직하게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책을 읽으며 흠칫 놀랐던 부분은 저자가 한달에 10권 넘게 읽는다는 사실이었고 (우와, 이렇게 많이 읽는 사람이 있다니! 같은 의미에서) 어떻게든 바쁜 일상 속에서도 다른 것을 포기하고 읽으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모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모두 바쁘니까.
한 달에 대략 열 권 내외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 시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산술이 복잡해지는 지점은 내가 하루에 최소 8시간 이상 직장에서 일해야 하는 회사원이라는 데 있다.
물론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일반 회사원보다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데 써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외에 먹고 씻고 자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기본적인 일에 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은 시간은 놀라우리만치 적다.
책 읽을 시간을 실제로 확보하지 못하면 실행할 수가 없다.
그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뿐이다.
바로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책 읽을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동료들과 맛집을 탐방하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버스에 앉아 바깥을 보며 멍 때리는 시간을 아꼈다. 악기를 배우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드라마를 정주행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춤을 배우거나 자격증을 따거나 게임을 하는 대신 그냥 책 읽기를 선택했다.

사실 책 읽기는 '겨우' 하는 일이다.
무수한 다른 즐거운 일과 맞바꿔야 하고, 오랫동안 허리를 세운 채 앉아 있어야 하고,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즉각적인 보상이 이뤄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세상엔 책 읽기 말고도 '겨우'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어른 노릇,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출근하기, 청소하기, 밥 차리기. 그런 일을 다 해내고 나면 진이 빠져 책 읽을 에너지는 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이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의지 부족일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에게 운동까지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지쳐서. 충분히 지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중력이 딱히 필요 없는 유튜브 쇼츠 보기가 전부여서.

독자로 살면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만만찮다. 경외하는 마음 못지않게 업신여기는 태도도 있다.
그 모든 것이 한 명의 독자 안에 담긴 이야기다.
따라서 독서는 역시 시간을 내고 좋아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밖에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이 책에는 많았다.
가령 전반적인 독서에 관한 이야기도 그랬지만 양서의 기준이라든가, 소장한 책을 처분한 일이라든가.
또 유달리 새롭게 여겨진, "나를 이따위로 만든 책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책을 읽고 자랐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같은 물음도 좋았다.
책은 관념적으로는 지식의 집합체이지만, 그에 앞서 무엇보다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다.
언젠가 진짜 내 집이 생길 때를 기약하며 세탁기도 냉장고도 늘 셋방에 구비된 것을 사용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책만큼은 항상 나와 함께 이사 다니는 진짜 '내 살림'이었다.
800권 남짓한 책과 함께 서울 땅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당일 이사가 되는 곳을 찾아 황급히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다행히 한 이삿짐센터와 연결이 됐다. 마지막 박스까지 새집에 옮겨 놓은 뒤 구세주 분들에게 일당을 건네며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허리는 좀 아프다"며 씨익 웃던 사장님이 덧붙였다.
"죄송할 것 하나도 없어요. 젊은 분이 공부 많이 해서 훌륭한 일을 하시려나 봐요."
나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훌륭한 일을 하려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 말에 하루의 긴장이 모두 녹아내렸다. 새집은 큰방 하나에 작은방 하나 그리고 아담한 거실이 딸린 집이었다. 나는 작은방을 책에 내줬다.
책의 권수가 천 권을 넘어가자 내가 어떤 책을 갖고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다시 보지 않을 책이었다.
어느 날 책 암초에 또 발가락을 찧고는 책을 노려보다 깨달았다. 더 이상 책을 볼모 삼을 필요가 없다는 걸. 책은 내게로 와서 잠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걸로 충분했다.

유명 인사에게 으레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책은 무엇인가요?"다. 이때의 함의는 당연히 '오늘의 당신을 이토록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 책은 무엇인가요?'다. 책을 읽으면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꼬인 나는 이 질문이 이렇게도 들린다.
"오늘의 당신을 '이따위' 인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책은 무엇인가요?"
책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믿음은 너무나 오래되고 견고해서 반대의 가능성—책이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든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문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책이 인간을 더 비관적이거나 병적으로 만든 사례 또한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런데 책을 버리는, 아니 버린다고 하기에는 마음이 아프니까
처분하는 독자는 나쁜 독자일까.
사실 마음 아프다고 하기엔 이미 많이 정리해본 입장에서는 책을 읽고 버리는 독자는 어느 독자에 분류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번 즈음은 누구나 생각해볼 법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책.
난 내가 어떤 취향의 책을 좋아하는지 대강은 알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따위 인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책이라니-!
하지만 나에게 좋았던 책도, 좋지 않았던 책도 인용되었던 다카다 아키노리의 말처럼 어떻게든 뭔가 남기긴 했을 것이다.
또 돌이켜 보면 책이 아니면 멋대로의 사유도 통찰도 생겨날리 없다.
그 앎을, 배움을, 지식을, 정보를 그나마 옅게라도 인지하게 해주는 것은 책 밖에 못한다.
내 생각에 그런 건 책이 아니면 얻지 못한다.

물론 책을 읽고 훌륭한 생각과 사고, 통찰을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역시 책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든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책 또한 재미로, 궁금해서 읽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경우에는 그런 듯하다.
그리고 저자는 말했다.
"나만의 기준으로 고르고, 내 속도와 방식으로 읽고, 다 읽은 뒤 곱씹는 과정까지 모두 '나'가 주어인 행위.
지극히 고독한 동시에 충만한 읽기라는 행위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며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책이 사람한테 와서 남기는 그 무엇이 있기에 계속 사람들은 읽는 건지도 모른다.
더구나 요즘의 책은 다른 빌려볼 수 있는 영상 매체와 달리 소유할 수 있는 대중문화 상품이기도 하다.
그러니 후에는 떠나보내게 되더라도 그 순간은 보다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런 말을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일까.

넉넉해진 책장에 남은 200권을 보며 나는 망겔의 할머니가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야. 현재 가지고있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현재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즐기게 되니까. 우리는 상실에 익숙해져야 해."
결국에 모든 것은 흘러가고 상실되고 부재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억이 떠올랐을 때 그 의미는 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쓸쓸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상실에 익숙해져야 해.'

아무튼 천권 이상 소장했으며 한달에 10권 내외로 읽는다는 저자는 정말 부지런히 읽고, 책을 정말 좋아하는 독자가 맞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단지 책을 좋아해서인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한데 좋은 독자란 무엇일까.
전체적으로 책에서 볼 수 있던 글로 보면 그냥 독자, 진지한 독자, 편협한 독자, 줏대 없는 독자.
어떻게 다른 걸까.
하지만 세상에 좋은 책만 있는 것도 아니니 꼭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문득 '엉망진창이로군' 같은 말이 떠오른다.
역시나 양질의 도서에 엉망진창의 그런 감상.
그러므로 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궁금하다면 꼭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