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V 빌런 고태경, 정대건
은행나무
언젠가 어디에선가 읽었다.
이 소설의 제목과 함께 GV 빌런의 특징을.

GV 빌런은 GV와 빌런(Villain, 악당)의 조합이다.
관객과의 대화에 등장해서 분위기를 흐르는 GV 빌런은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블로그에나 쓸 감상을 정황하게 연설하며 지식을 뽐내는 '나 이렇게 영화 많이 알아' 유형.
그것의 변용인 '제 해석이 이러한 데 이게 맞나요?' 유형.
저는 A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제가 처음 감독님 영화를 본 건 칠 년 전이었는데요. 그때도 질문했는데 감독님 저 기억하나요? '세상의 중심은 나' 유형.
셔터 소리를 과하게 내며 계속 사진을 찍거나, 사생활에 대한 난처한 질문을 하는 '파파라치' 유형.
그 장면은 이렇게 찍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캐스팅 후회하지 않느냐 같은 '훈계 및 평가' 유형.
통역사가 있는데 굳이 외국인 게스트에게 본인이 영어, 불어, 일어 등으로 직접 질문해서 통역사 일 두 번 하게 만드는 '나 외국인 능력자야' 유형 등등.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나머지 관객들의 몫이었다.
GV빌런이라니. 그런 용어는 처음 들어본다.
GV 영상만 몇 번 본 적 있는 나는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지? 그 식견에 늘 감탄하며 보는 쪽이었으므로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는 참 별스러운 말이 다 있네 싶었다.
그러나 간혹 느낌상 저건 아니다로 보인 적도 있었으므로 몇몇 부분은 동의하는 바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해서 대답하기도 헷갈리게 만드는 유형.
(GV와는 다를 테지만 간혹 기자들도 저런 빌런 유형처럼 질문하기도 하는 것 같더라)
하지만 질문하는 관객을 저런 식으로 뒤에서 명칭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빌런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자신은 질문도 하지 않을 거면서.
아니 나 질문 있어! 쪽이면 질문할게 있었는데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안 뽑아줘서일까.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 한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악당이라고 험담하는 건 조금 치졸하지 않나 싶다.
단지 불쾌할 수 있을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서슴없이 행하는 무례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감독이나 배우가 분위기 싸해지게 받는 모습도 또 아닌 듯하다).
어쨌거나 소설은 GV 빌런 유형의 글을 접한 후 궁금해 읽게 되었고,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요약하면 영화 감독인 혜나가 GV 빌런으로 알려진 고태경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혜나는 현재 영화감독으로 잘 되지 않고 있으므로 영화와 관련한 꿈, 선택, 완성, 포기, 고민이 소설에서 내내 이어지기도 한다.
두서없이 적어보면 이러했던 글들.
지금 내가 히치콕과 트뤼포의 전기를 내다 판다고 해서 영화감독의 꿈을 접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접는다는 말도 우습다.
나는 이미 영화감독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직업 영화인이 아닐 뿐이다.
택배를 받을 부산에 사는 배영준 씨는 어떤 씨네필일까. 부디 이 책을 읽고 영화 같은 걸 하지는 말기를.
이게 다 '초록 사과' 때문이다.
"힙하다는 거 대체 뭘까."
"사람들이 따라다닐 걸 제공하는 거지 뭐. 예전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인도에 갔는데 요즘에는 잃어버린 자아가 아이슬란드에 가 있잖아.”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그럼 너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건데? 알바하면서 너 돈 쏟아가면서 영화 찍고, 영화제 가면?
수상해서 상금타는 건 일부지. 제작지원금 받는 것도 박 터지는 경쟁이고.
너 감독님 소리도 들어봤잖아.
그거 별거 없잖아."

상업성이라는 건 대체 뭐고 그 판단의 주체는 누굴까?
대표의 취향? 제작자, 투자자의 입맛?
그게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왜 그렇게 고예산의 처참한 흥행실패작들이 나오는 걸까.

"영화감독이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연기는 배우가 하고, 감독은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선택에는 정답도 없고. 그래서 어렵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감독의 말을 듣겠어. 남들보다 잘 선택해야 돼.
선택의 프로가 되어야 해."


승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들을 멀리서 카메라로 포착한 롱 숏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변하는 계절의 풍경 속에 작게 녹아들어 있었다. 뭉게구름이 빠르게 흘러갔고 기분 좋은 햇살이 느껴졌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보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GV 빌런 고태경보다는 꿈에 관한 좌절 및 고민으로 공감과 위로, 용기를 얻고 싶다면 이 이야기는 많은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건 무책임한 꿈 장사, 서비스업의 독려와는 분명 다르다.
문학이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태경은 누구인가?
고태경 또한 과거 영화계 종사자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계획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고태경을 단순히 GV 빌런 관객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다시 말해,
고태경은 영화를 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
영화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영화를 만든 적은 없으므로 GV 빌런이네 할 수도 있을지도.

소설은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혜나가 일관적이게 영화 이야기만 하므로 소설이 보여주는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의, 사랑이 깊다면 깊다.
그래서 영화계 종사자, 영화인, 영화인 주변부 사람들이라면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다만 혜나의 행동 반경 및 전개가 영화 촬영,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 영화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다소 답답하게 느껴진 점은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읽다가 난데없이 아, 혜나는 자기 집이 없어? 이런 의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집으로 나가거나 돌아오거나 집에서 혜나가 물 한잔이라도 마실 법한데 그런 묘사의 글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있었다 해도 크게 인지가 안 됐다.
물론 소설 속 인물이 집에서 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건의 큰 낙차나 고조 없이 내내 영화 이야기로만 이어지는 것이 생활이나 공간감은 덜 느껴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만큼 혜나의 마음과 생활이 오로지 영화로만 꽉 차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영화제 참석 무렵 남자 친구가 변한 것도 나로서는 갑자기 왜? 이게 뭐지? 느낌으로 다가온 것도 사실이었다.


한편 고태경이라는 인물의 설정.
상상했을 때 영화를 좋아하는 나이가 든 영화인.
채화영과 연결했을 때 멋있게 나이 들었을 수도 있는데 뭉그적거리다 개정판 전 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전 표지 이미지만 보면 다소 생각한 바와 달라 매칭이 잘 안됐다.
더구나 연출, 배우, 제작 등 영화계에 몸 담그고 싶은 사람만 GV에 참석하는 건 아닐텐데.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고태경 정도의 영화에 관한 관심은 일반 관객이 갖기는 힘들다고 봐야할까.
그래서 고태경이었기에 혜나에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하고 말해줄 수 있었던 걸까.
선택처럼 빛과 어둠.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데 왜 대부분의 사람은 영화를 좋아할까.
영화 감독들은 왜 그렇게 영화가 좋을까. 영화를 찍고 싶어할까.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길 바랄까.
그 마음까지는 일반 대중이, 관객이 알 수 있을리 없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그 감정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아하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에서 '영화'는 각자 소망하는 것으로 놓고 봐도 충분히 그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포기 없는 완성, 그 완성된 것들에 박수를, 완성되고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도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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