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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다다서재

目の見えない白鳥さんとア-トを見にいく

 

 

일본의 논픽션 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어느 날 친구를 통해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겐지를 소개받는다.

시라토리 겐지는 미술관 관람을 좋아하며 꾸준히 오랫동안 다양한 미술관을 다니며 예술작품을 감상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면 여기서 눈이 보이는 독자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미술작품을 관람하지?’

 

이러한 질문은 처음에 이 책을 쓴 저자가 품은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 전맹인 시라토리 겐지가 어떻게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지 그와의 첫 미술관람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럼, 무엇이 보이는지 가르쳐주세요."

시라토리 씨가 작품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 채 내게 속삭였다.

마이티가 "그림은 이쪽에 있어"라면서 시라토리 씨의 몸에 손을 슬쩍 대고 그림과 똑바로 마주하도록 했다.

그 순간, 번개처럼 이해했다.

그렇구나, 시라토리 씨는 '귀'로 보는 거야.

저기, 그러니까 그림 속에 뭐가 보이냐는 거지요...

알겠습니다!

나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라토리 겐지 씨는 작품을 눈이 아닌 귀로 감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은 가와우치 아리오의 시선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미술을 관람하는지에 관한 여러 생각과 함께 친구들과 미술관을 다니며 나눈 대화, 그와 접한 흥미로운 예술 작품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후에 이러한 경험은 영상작품 제작으로까지 이어지게 되기도 한다.

 

 

책은 굉장히 좋고 재미있다.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평소 미술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을만큼 미술에 관해 다양한 시각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관람하고 경험한 여러 예술 작품 중 내 눈길을 가장 끌고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와 꿈의 집이었다.

특히 볼탕스키의 램프 인간의 말은 옆에서 계속 듣지도 않는데 주절주절 속삭이는 듯한 장면이 연상돼 좋았다.

 

 

 

그다음 순간, 더욱더 기기묘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나무 막대가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모양이고, 머리(부분)가 전등이야."

마이티가 가리킨 방향에는 '램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 법한 기이한 인형이 있었다.

아리오: 목소리가 들려.

시라토리: 응, 들리네. 아까 전부터 말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시라토리 씨는 한참 전부터 속삭임을 듣고 있었던 듯했다.

 

—있잖아, 알려줘. 갑작스러웠어?

—무서웠어? 알려줘. 의식은 있었어?

—Tell me was it brutal?(말해줘. 그건 잔혹했어?)

—Tell me did you pray?(가르쳐줘. 그때 기도했어?)

—있잖아, 당신은 하늘을 날고 있었어?

—빛이 보였어?

—있잖아, 죽은 다음에 억지로 부활당하면 어떤 기분이야?

 

가슴이 덜컥했다. 램프 인간은 명백히 사람이 죽는 순간에 관해 질문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와 동떨어진 질문의 내용에 섬뜩했다.

"절대로 (죽은) 당사자에게 닿지 않을 질문들이네."

모든 램프 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마이티가 어이없다는 듯이 지적했다.

 

—가르쳐줘. 죽음이란 어떤 느낌이야?

어이, 램프 인간. 아무리 말을 걸어도 죽은 사람은 답해주지 않아. 그게 상대성 원리보다도 분명한 이 세계의 섭리라고.

 

 

그러나 역시 시끄러워일까.

램프 인간 같은 거 저리 가일까.

오히려 그렇게 받아들이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생김새도 그렇고

상상해보면 귀여운데...

 

 

하지만 이런 감상은 실제로 붉은 방에 누우면 무서워 할 거면서 막연히 어둠에 관대하고 싶은 내 마음이 투영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예술 관람은 다 함께 할 수 있고 해석도 다양해 좋은 것이구나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치 끝내 밝혀진 것 같은 시라토리 씨의 마음 같이.

 

 

 

"그림을 보는 활동 말이야. 확실히 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활동으로 그림을 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 나도 겐지도.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거죠."

 

 

물론 시라토리 겐지 씨의 입장은 자신의 말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주변 사람들이 말했듯 함께 하는 그 순간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이 좋아 미술관이 좋았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일반화할 수 없지만 다르게 보려고 하는 건 비장애인의 마음일 뿐이고, 같은 사람으로서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눈이 보여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저자가 말했듯이

"다정과 배려도 지나쳐버리면 편견과 차별이 된다"

는 것을 보다 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점은 마치 아는 만큼 보인다의 다른 버전인 것 같은 글이었다.

 

 

같은 그림을 보았는데, 왜 이토록 인상이 다를까. 여기서 좀 고찰해보겠다.

그건 아무래도 '보기'의 과학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시각이라 하면 '눈'과 시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뇌와 관련된 문제라고 한다.

오래전, '사물을 보는' 행위는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할 만큼 단순한 일로 여겨졌다. 저기 있는 물체를 시야에 담기만 하면 만사형통! 자, 찍어요!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근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점 '보기'가 얼마나 복잡한 행위인지 밝혀졌다.

사물을 보는 행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전에 축적된 지식과 경험, 즉 뇌 내의 정보다.

우리는 풍경이든, 예술이든, 사람의 얼굴이든, 전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기초해 해석하고 이해한다.

 

관람자는 뇌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에 기초해서 작품을 본다고 했다.

그러니 작품에서 무언가를 느끼거나 의미를 찾는 것은 관람자의 몫으로 그 결과에는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이 짙게 배어난다. 예술을 보는 행위의 재미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다양한 해석을 용인하는 작품의 넓은 품이 시대와 사람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작품을 보는 행위의 목적은 작품의 이미지를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실마리로 삼으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 그 전부를 한데 아우르는 '대화'라는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흔히 듣는 그 말에 관해 속으로 '대개 아는 척 하는 말이네'로 여겨왔는데, 책의 뇌의 관점에서 보니 어떤 말인지 달리 이해됐다.

그러니까 그 말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경험한 만큼 알 수 있다'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이렇게 읽은 것은 나의 뇌가 가진 정보와 경험, 기억, 가치관에 기초한 해석일 수 있으므로 책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시각장애인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두루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책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마침 내 책상 옆 책상의 램프에게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책, 너무 재미있지 않아? :)"

결국 어둠은 적이 아니다. 그런 인상의 책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든 즐길 수 있게 다양한 예술작품이 눈으로도, 귀로도 가까이 속삭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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