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정말 행복하다고 하는 나라에 가서 살면 행복할까.
그 나라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행복하다는 걸까.
어쩌면 그런 궁금증이 있었다면 이 한 권의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행복의 지도, 에릭 와이더
웅진지식하우스 출판
The Geography of Bliss: One Grump's Search For the Happiest Places in the World
작가는 10개국을 여행하며 행복을 주제로 이 책을 썼다.
2007년에 집필한 책이므로 사정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한 나라가 가진 문화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은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기에 정말 좋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네덜란드, 스위스, 부탄, 카타르, 아이슬란드, 몰도바, 태국, 영국, 인도, 미국의 10개국 내용이 있지만 인상적이었던 나라는 스위스, 부탄, 카타르, 아이슬란드였다. 더러 몰도바는 한국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행복한 이유가 아니다.
작가는 여행을 한 것이 아닌, 행복에 관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옮긴이도 적었듯이 가족, 친구,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 신뢰, 지역 공동체 등등이 행복의 이유, 그게 다라서 조금 맥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다른 행복을 다룬 책이나 연구에서도 익히 들어왔던 것이다.
쉽게 보면 행복은 작가가 썼듯이 단지 오락가락하는 날씨와 같을 수도 있다.
"행복에는 말이 필요 없다.
우리가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딱 세 가지밖에 없다.
긍정적인 감정(좋은 기분)을 증가시키는 것, 부정적인 감정(나쁜 기분)을 감소시키는 것,
아니면 화제를 바꾸는 것."
그렇다면 불행한 나라의 사람들은 왜 불행하다는 걸까.
대부분의 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이므로 흔히 행복에 관한 이야기에서 돈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리고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비교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한 요소이기도 하다.
비교하면 부러움 혹은 시기심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말한다.
"남이 가진 걸 시기하지 마."
시기심은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기심이죠."
"그게 여러분이 행복한 이유라고요?"
스위스인들은 시기심이 행복의 커다란 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기심을 짓밟아버리려고 한다.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돈이 있으면 마구 뽐내자는 것이다.
스위스인들은 돈 얘기를 싫어한다.
"아이슬란드에는 시기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시기심 부족은 스위스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스위스 사람들은 시기심을 억누르기 위해 물건을 숨긴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시기심을 억누르기 위해 물건을 함께 나눈다.
시기심은 일곱 가지 죄악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죄다.
조지프 엡스타인은 시기심에 관한 글에서 일단 시기심이 풀려나면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왜 몰도바인들은 감시하는 경비원이 없는 거죠?"
"아, 경비원은 필요 없습니다." 관광 안내인이 대답했다. "한 사람이 솥단지를 빠져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다시 안으로 끌어내리거든요."
행복의 적, 시기심이 몰도바에 만연해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의 시기심은 유난히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대개 시기심에 동반되게 마련인, 강렬한 야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몰도바인들은 시기심의 좋은 점은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나쁜 점만 죄다 안고 있는 꼴이다. 시기심의 좋은 점이란, 사람들이 야망에 불타서 자기가 남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업을 세우고 건물을 세워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몰도바인들은 자기가 성공하는 것보다 이웃이 실패하는 데서 더 기쁨을 느낀다. 이보다 더 불행한 상황이 있을지 상상이 안 간다.
"LG : 인생은 좋은 것"
저 광고판, 아니 소비문화 전체가 몰도바인들을 비웃고 있다. 대부분의 몰도바인들에게 광고 속의 상품들은 영원히 그림의 떡일 테니까 말이다. 조지프 엡스타인은 시기심에 관한 저서에서 광고업계 전체를 가리켜 "시기심을 생산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라고 말했다. 몰도바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기심을 풀 곳이 전혀 없다. 그래서 유독성 폐기물처럼 시기심이 계속 쌓이기만 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심은 왜 비롯될까.
정말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돈 때문일까.
그런데 돈이 많으면 정말 행복할까?
그런 면에서 보면 카타르는 돈으로 지어진 나라다. 문화는 없다.
몰도바는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나라다. 몰도바 사람들은 돈이 없다.
부탄은 부를 겪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행복하다.
물론 작가가 한 시절에 겪은 나라와 일부 사람들이 그 전부라 볼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은 중요하다. 그런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도 못한다.
또는 작가에게 누군가 물었듯이 이렇게 여길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은 그저 더 나은 생활이 있다는 걸 모를 뿐이에요.
만약 이 사람들한테 미국을 보여주면, 자기들에게 없는 게 뭔지 깨달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
이어 작가는 적는다.
"나는 해외에서 공부한 부탄 사람들 중 90퍼센트가 서구에서 고소득을 올릴 기회를 포기하고 이곳 부탄으로 돌아온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부탄과 관련해 흥미로운 글이 또 있다.
"그 여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벽장에 온통 신발만 보관하고 있었잖아.
여기에는 신발이 아예 한 켤레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맞아, 그런데도 행복해 보여."
그는 완전히 넋을 잃은 상태였다. 남게이가 존재조차 모르던 욕구를 채워줄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찬 상점이라니. 그는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들고 진심으로 경이를 느끼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물건을 사서 소유하겠다는 욕망이 없었어요." 린다가 말한다. "물건을 들여다보며 경탄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만족했어요."
이런 것을 보면 일종의 '행복에 돈은 중요하다'라는 믿음은 자신이 사는 나라나 환경의 영향을 받고 한번 정해진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돈을 믿느냐, 사람을 믿느냐 그 차이인 걸까.
그러나 그 무엇을 믿든 일반적으로 돈에 대한 믿음은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거야' 같은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수와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원하는 금액만큼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기 마련인 게 삶이다.
도달하면 또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따라서 너무 흔해 맥빠진 소리일 수는 있어도 돈으로 편하게 살 수는 있어도 사람 없이 행복하기는 어렵다.
책에서 말한 돈과 행복에 관한 글들도 그 사실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옛날에는 돈을 뒤쫓다 보면 행복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굶주린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자, 이 햄버거를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맛있죠? 자, 햄버거는 많이 있으니까 계속 먹어요."
"내 친구 하나는 바로 얼마 전에 8000달러나 하는 가방을 샀어요. 삭스 피프스 애비뉴 백화점에서 파는 예쁜 가방이었는데, 친구가 얼마나 좋아했다고요."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고대 스토아학파의 철학까지 갈 것도 없이, 최신 사회과학 연구 결과들 역시 모자의 친구가 그 가방으로 인해 오랫동안 행복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예언한다. 머지않아 그녀는 1만 달러짜리 가방을 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에는 똑같은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1만 5000달러짜리 가방을 사야 할 것이다.
쥐들이 먹이를 먹는 동안 시상하부를 자극하는 실험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쥐들은 음식을 다른 때보다 많이 먹었지만, 몸짓을 보고 판단하건데 그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네틀은 "어떤 것을 크게 갈망하다가도 일단 그것을 손에 넣고 나면 즐거움을 거의 또는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했다.
무엇을 원하는데 사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경제학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인간이 겪는 불행의 많은 부분은 이처럼 미친 뇌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새 차나 복권 당첨 같은 것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일단 그 꿈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경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런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 즉 주관적인 복지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데 그 정도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 1년에 1만 5000달러 정도. 그 선을 넘으면 경제성장과 행복의 관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미국인들은 50년 전에 비해 평균 세 배나 부자가 됐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일본을 비롯한 많은 산업국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의 리처드 레이어드 교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돈은 더 많아졌고, 일하는 시간은 줄었고, 휴일도 늘어났고,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수명도 길어졌고, 건강도 좋아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야심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사무실이 곧 신전이고, 직원 지침서가 곧 경전이다. 신성한 음료인 커피는 하루에 다섯 번씩 마신다. 야심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없다. 그들은 매일 일찍 일어나 PC의 지시 속에서 야심이라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혼자 기도한다. 언제나 혼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야심은 복수심이 강한 신이다. 그는 자신을 성실히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린다. 하지만 그가 성실한 신자들을 위해 마련해둔 일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성실한 신자들은 그 누구보다 비참한 운명에 시달린다. 그들이 늙고 지쳐서 사무실 구석 자리로 밀려난 뒤에서 성경 속의 뇌성처럼 깨달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야심이라는 신은 처음부터 가까운 신이었다는 깨달음.
사회과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 중 약70퍼센트가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나 친구, 가족, 직장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추정한다.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주위 사람들의 정이 고통을 덜어준다. 그리고 좋은 시절에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행복이 한층 더 커진다.
따라서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은 타인이다. 그럼 돈의 역할은 뭐지? 돈은 우리를 타인에게서 고립시킨다. 돈 때문에 우리는 실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벽을 쌓아 올린다. 우리는 학생들이 들끓는 대학 기숙사에서 아파트로, 다시 단독주택으로 차츰 옮겨 간다. 아주 돈이 많다면, 아예 넓은 땅을 사서 저택을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신분이 상승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벽을 쌓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카타르 사람들은 졸부들이 다 그렇듯이,
오만과 불안감이 묘하게 뒤섞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들이 무엇보다 갈망하는 것은 남들의 인정이다.
카타르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돈을 쓴다.
나는 부탄에서 반드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진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요?
카르마는 재빨리 대답한다. "때로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잘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걸 목적으로 생각해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행복은 관계인데, 서구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나는 스위스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신뢰가 행복의 선행조건이라는 말. 정부와 제도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신뢰도 필요하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겪은 변화는 고작해야 집으로 돌아온 뒤에나 드러난다.
인간은 설사 유목민이라 해도 고향이나 집이 필요하다. 집이 꼭 한 곳일 필요도 없고, 어떤 장소일 필요도 없지만 모든 집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첫째, 공동체 의식. 그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역사.
카타르에도 물론 과거가 있지만,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대략 서기 650년부터 1600년까지 1000년 동안의 역사가 없다.
우리는 고향이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변화는 불안하다. 옛날에는 운동장이 바로 여기 있었어! 틀림없어. 우리 고향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우리 자신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두바이에 간 적이 있는데, 건물들이 전부 아주 새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마분지로 만든 건물처럼, 실체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두바이 여행을 마치고 런던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런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런던 날씨가 워낙 끔찍하잖아요. 그런데 런던에 돌아오니까 기분이 한층 좋아지더란 말입니다.
건물들도 단단해 보이고요. 마치 지하 6층 깊이까지 뿌리가 박혀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 단단함이 행복의 선행조건일까? 그 단단함이 우리를 땅에 붙들어두는 걸까? 허공 속으로, 절망 속으로 둥둥 떠가지 못하게?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지형뿐만 아니라 조상이 살던 곳의 지형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불행한 나라들은 모두 똑같지만, 행복한 나라들은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하다.
여기서 탄소를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탄소가 없었다면 우리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탄소는 모든 생명체의 기반이다. 그 생명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탄소는 또한 카멜레온 같은 원자이기도 하다. 탄소를 서로 단단히 맞물리게 배열하면 다이아몬드가 된다. 아무렇게나 헝클어놓으면 검댕이 된다. 배열 방법이 이렇게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장소도 똑같다. 각각의 장소에 존재하는 여러 특징보다는 그것을 어떤 비율로 어떻게 배열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배열 방법에 따라 스위스가 되기도 하고, 몰도바가 되기도 한다. 균형을 제대로 잡는 게 중요하다. 카타르는 돈은 지나치게 많고, 문화는 부족하다. 카타르는 지금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어떤가. 아이슬란드는 아직 행복해질 권리가 없는 나라인데도 행복하다. 균형을 제대로 맞춘 덕분이다. 작은 나리지만 분위기는 국제적이다. 어둡지만 밝다. 효율적이지만 느긋하다. 미국의 진취성이 유럽의 사회적 책임과 결합했다. 완벽하고 행복한 조합이다. 이 나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건 바로 문화다. 문화가 이렇게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허무를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낯선 땅을 정복하기도 하고, 달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호텔 방에서 혼자 케이블티브이를 보기도 하고,
총으로 서른 두 명을 쏘아 죽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기도 한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럽 실업자의 행복도는 직장이 있는 사람들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인정 많은 복지제도 덕분에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월급과 똑같은 액수의 보조금을 받는데도 말이다. 이 불편한 현실은 한가로운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에 푹푹 구멍을 뚫어놓는다. 사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쁘지 않은 사람보다 지나치게 바쁜 사람이 더 행복하다. 다시 말해서, 흥미로운 노동이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라는 극작가 노엘 키워드의 말이 옳다는 얘기다.
결국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일을 하고 집에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물질 어린 소비들도 하지만 돈으로 역사와 문화를 살 수 없듯이 사람 또한 살 수 없다는. 인간 관계와 행복에 돈은 윤활유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게 삶의 목적이나 전부는 아니라는.
만약 돈으로 그 무언가를 다 살 수 있다고 해도 과연 돈으로 쌓아올린 문화나 역사,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돈이라는 토대 위에 지어진 삶이 굳건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지면 그 또한 쉽게 사막 위의 신기루처럼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믿고 선택하든 자유지만 세상이 발전하고 편해지면서 우리는 점점 돈과 경험, 사람까지 함께 잃어가고 있다.
이즈음에서 다시 그 흔해빠진 말을 돌아보게 된다.
"모든 행복은 관계 속에 있어요."
그리고 저기가 아닌 여기에서 읽었지만 분명 이 책을 읽는 동안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차 책도 자본주의로 보면 돈이자 물성을 지닌 물질이므로 작가의 펜 이야기가 이 책에 대한 마지막 감상을 대변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펜이 내 손 안에 있는 동안 계속 즐거웠다. 정확히 아흐레 동안. 아흐레 뒤에 나는 뉴욕의 택시 안에서 그 펜을 잃어버렸다. 아니,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려다가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펜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산, 말도 안 되게 비싼 펜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가끔 그 펜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그 펜이 내게 준 기쁨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환상에 불과했다는 걸 속으로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다시 99센트짜리 펜을 쓰고 있다. 무게감이나 세련 감각 같은 건 없다. 그 펜이 나의 개성을 대변해주지도 않는다. 이건 그냥 펜일 뿐이다. 나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래서 내가 이 펜과 이렇게 사이가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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