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면하는 마음

 

직면하는 마음, 권성민

한겨레출판

 

 

'나날이 바뀌는 플랫폼에 몸을 던져 분투하는 어느 예능PD의 생존기'라는 부제처럼 예능 PD가 예능 만드는 일에 관해 쓴 책이다.

글을 쓰다 보면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만도 한데 오로지 PD로서만 쓴 글 같이 보여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예능 제작이 궁금해서 읽은 것에 비해서는 구체적인 제작 과정은 많이 안 적혀 있어서 아쉬웠던 것도 같다.

책에서 기억에 남았던 내용은 이러했다.

 


"그거 다 대본 아니에요?"

 

애초에 장르가 뭐가 됐든 콘텐츠에 '100퍼센트 리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연출자라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예능도 마찬가지다. 토크쇼나 버라이어티에도 다 대본이 있다. 대본 없이 출연자에게 완전히 맡기는 방송이라 한들 카메라가 있는 이상 그게 '100퍼센트 현실'일 수는 없다. 제작진의 개입 없이 출연자들이 자유롭게 여행하는 프로그램도, 실제 현장에서는 일군의 스태프와 카메라들이 화면 밖에서 따라다니고 있다.

누가 봐도 방송 촬영인 만큼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이고 친절해진다. '관찰 예능'의 자연스러움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예능의 경우 그런 작위성을 피하기 위해 카메라마저 곳곳에 숨기고 제작진은 아예 다른 건물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를 찍고 있다'라는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관찰은 그 자체로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

 

 

책을 읽으려고 집어 들었을 때 제일 재미있는 대목은 어딜까? 표지다.

책을 읽는 일이 고되다는 뜻의 농담이 아니다.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책이란 수없이 많은 평범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매혹적인 표지를 열어보면 하얀 종이 위로 윤기 없는 글자들만 끝없이 이어져 있다. 아마 이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표지에서 떠올린 그 흥미로운 내용을 만나기야 하겠지만, 그러려면 이 수많은 문장들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한다. 독서라는 활동 안에 포함된 이 필연적인 무료함은 책의 진짜 재미에 닿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실체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낸 책은 표지만 보고 상상한 것 것보다 반드시 더 가치 있는 경험을 선물한다. 자기 두 발로 직접 다녀본 길은 이제 지도만 봐도 어떤 장면들을 만날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으니까.

 

 

PD는 많은 예산으로 많은 동료들과 함께 방송을 만드는 회사원이다. 당연히 만들 때도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보다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를 더 많이 고민한다. 하지만 내 안에 없는 걸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한대'라는 이유 하나로 모양만 흉내 냈다가 외면받은 방송들이야 꼽아보자면 끝도 없다. 결국 PD의 직업 생활이란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양으로 빚어내는 과정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버리는 작업을 반복한다는 것은 결국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없는 타협을 거칠수록 각자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형체가 드러난다.

 

비루하고 궁색하더라도 결과물이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떻게든 한 번 완성해보면 두 번째는 약간 더 할 만하다. 그때 더 괜찮은 걸 만들면 되지. 그렇게 지금 손에 쥔 것들만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래서 뭐라도 남기며 전진하는 것. 그게 이 이 일이 나에게 알려준 가장 중요한 태도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실체가 있다면 디디고 나아갈 수 있다.

 


 

그 외는 의아하게 책에서 지나가듯 읽힌 말이었는데 주호민 작가가 말했다는 "아뇨, 그냥 이렇구나, 끝. 이래도 만족이에요.” 라는 말도 머리에 남았다. 

더구나 나는 이것저것 챙겨보는 타입이 아니라서 톡이나 할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책을 보니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톡이나 할까?라는 아주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든 PD가 쓴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반면 표지만 보고 상상하기에는 소프트한 느낌의 책이라 책을 쓴 저자의 성별이 여성일 줄 알았는데 권성민 PD가 남성이라는 것도 아주 의외로 다가온 점이기도 했다.

 

여하튼 '직면하는 마음'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전체적으로는 뭔가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쓴 책인 것 같은 인상이었고, 이런 책은 보기 쉽지 않은데 PD라는 직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PD에 관해 알기에 미약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술술 잘 읽히는 책이라 좋았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취의 맛  (0) 2022.12.07
보통의 언어들  (0) 2022.12.04
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  (0) 2022.11.29
마케팅 때문에 고민입니다  (0) 2022.11.26